내가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전혀 이끌어가지 못하는 나는 협상의 젬병이다. 그래서 10년을 바라고 꿈꾸던 커리어를 발전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서른 중반이나 된 나이에 등신처럼 날려먹은 적도 있다. 협상의 젬병이 프리랜서를 꿈꾸다니. 그래서 여태 지지부진한 건가. 아무튼 그런 내가 인터넷·TV 재약정을 할 때를 맞이했고 미숙한 나는 이것도 꽤나 스트레스가 됐다. 스트레스 안 받고 그냥 주는 대로 받고 털어버리는 대범한 성격도 못 돼서 평균 이상의 혜택은 받고 싶었기에.
해지 방어에 대해 대략 검색을 해보고 통신사 고객센터에 문의를 했다. 인터넷에서 본 대로 처음 제시해주는 혜택은 역시나 별로인 것 같았다.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며칠 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 해지 예약을 하겠다고 하자 또 혜택을 제시해주는데, 오히려 처음에 제시받았던 조건보다 별로였다. 이전에 이런 조건을 제시받았는데 그렇게는 안 되느냐 물었더니, 상담사가 그런 조건은 나올 수 없다며 마치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얘기를 하길래 기분이 상해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해지 예약을 해버렸다. 그러고 나서 또 한동안 기분이 몹시 가라앉았다. 처음 통화했을 때 그냥 재약정을 할걸. 유연하게 말을 잘해서 조금만 더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낼걸. 언제나 후회투성이 나.
다른 통신사로 갈아타는 건 무기력한 현재의 나로서는 엄두가 안 나 며칠 후에 해지를 취소하기로 했다. 전화를 걸기 전에 다시 재약정 혜택을 제시받는다면 떨 거 없이 차분하게 처음 조건을 목표로 협상을 해보자고 내가 나에게 일러줬다. 그리고 연결된 상담사가 다행히도 처음 조건과 근접한 혜택을 제시해줬고, 내가 원하는 바를 얘기하자 세 번 다른 조건을 제시해줬다. 그래서 결국 맨 처음 조건보다 9만원의 혜택을 더 받았다. 야호!
그냥 운이 좋아 타이밍이 잘 맞고 상담사를 잘 만나서 협상이 잘 이루어진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살아온 방식대로 제시받는 그대로 바로 수긍하고서는 이게 최선이 아닌 듯한 기분에 두고두고 찜찜해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아 기쁘다. 겁내지 않고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활용해서 좋은 결과를 얻어 기쁘다. 중간에 한 번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 제법 오래 기분이 가라앉았는데, 앞으로는 그럴 때 기분 전환도 금방 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 잘했어, 나의 어른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