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보다는 버스를 훨씬 좋아하지만 출퇴근 시간에 변수 적고 믿음직한 교통수단은 단연 지하철이므로 요즘 자주 이용한다. 띄엄띄엄하고 센스 없는 배차 간격 탓에 환승 통로를 뜀박질하는 거나,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안쪽 자리로 들어가기 위해 혼자 신경전을 펼치는 거나, 답답하게 밀착되는 공기는 역시나 별로지만, 책을 읽게 된다는 점만큼은 좋다. 작년에 그 많던 시간 동안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서는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묵은 책들을 하나씩 클리어할 참이고, 하나 클리어했다!
첫 번째로 클리어한 책은 PD이자 독서가인 정혜윤이 만난 유명인사들의 독서 히스토리와 그들의 이야기에서 꼬리를 물고 피어난 저자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그들의 이야기보다는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비중이 더 큰데, 그래서 조금 아쉬웠다. 아마 내가 이 책을 살 때 끌렸던 이유는 영화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였을 테니까.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배치'에 주목한 진중권의 말과 영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에 대한 저자의 감상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작에 비해, 얼핏 쉽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는 정리나 구성 같은 작업도 사실은 잘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해, 또 잘된 정리와 구성의 효용이나 가치에 대해 생각을 하던 터라 진중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그리고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는 내가 본 그 영화가 맞나 싶어 깜짝 놀랐다. 솔직히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생각과 느낌, 그러니까 하나의 대상을 두고 여러 생각과 느낌을 모락모락 피워내고, 그것을 확신에 차 이야기하는 모양이 어쩐지 부담스러웠는데, 그렇게 많이, 깊이,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이라서 이런 감상을 할 수 있는 거겠구나 싶다. 푸른 물빛과 은빛 술병만으로 기억나는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도서관에 가서 놀아본 사람은 다 알 거예요. 아무 데나 가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면 다른 책의 인용으로 이뤄진 게 책이란 걸 말이죠. 그래서 독창성이란 건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다시 자기식으로 배치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어요. - 진중권
마이크 피기스 감독의 영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 내 어찌 그 영화를 잊을 수 있을까? 죽을 곳을 찾아 라스베이거스에 간 알코올중독자 역을 한 니콜라스 케이지 그리고 창녀 역할을 한 엘리자베스 슈. 만약 이 영화를 알코올중독자와 창녀의 희망 없는 막장 러브스토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내 옆에 붙잡아 앉혀놓고 이 영화가 왜 사랑 영화가 아닌지 이야기해주고 싶다.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절망에 관한 영화이다. '사람은 언제 자기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할까?'라고 묻는 영화.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순간에라도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하나쯤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인간적인 것 아닌가?'라고 묻는 영화. 혹은 '사랑하는 중에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해도 그건 덜 사랑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묻는 영화이다.